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열린 뉴미디어 소장품 전 – 아더랜드(Other Land)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공간을 보여주며,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정체성과 기억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탐구하는 전시였다. 이곳에서는 단순한 미디어아트가 아니라, 디지털 신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소멸하는 데이터, 사라지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통해 기술이 가져오는 망각과 변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전시는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1.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공간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기존의 미술관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캔버스나 조각 작품이 아닌, 거대한 스크린과 인터랙티브 아트가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미디어 작품들은 현실 세계와 흡사하지만, 어딘가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한 작품 앞에 섰다.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풀밭이 화면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손을 뻗어 닿을 수도 없었다. 디지털 코드로 만들어진 이 풍경은 현실을 정교하게 흉내 내면서도,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나는 문득 게임이나 메타버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비슷한 세계를 구축하는 시도를 떠올렸다. 언젠가 가상공간이 현실보다 더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어느 곳을 ‘진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해 주었다.
2. 디지털 신체, 우리는 누구인가?
전시를 거닐다 보니, 사람의 형태를 한 홀로그램과 아바타들이 움직이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데이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 작품은 특히 흥미로웠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스크린 속에서 나의 움직임을 따라 하는 디지털 아바타가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반영이 아니었다. 내가 손을 흔들면, 화면 속 아바타도 손을 흔들었지만, 약간의 딜레이가 있었고 때로는 전혀 다른 동작을 취하기도 했다. 나와 닮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은 존재. 이것이 진짜 ‘나’일까, 아니면 또 다른 ‘나’일까?
SNS 속 우리의 프로필, 온라인 게임 속 아바타, 가상현실에서의 또 다른 자아. 우리는 이미 디지털 공간에서 수많은 정체성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의 나와 온라인 속 나는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각기 다른 개체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 전시는 인간의 신체가 디지털로 확장될 때,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3. 소멸하는 데이터, 사라지는 기억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미해지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선명했던 화면이 점점 흐려지고, 마침내 검은 화면만이 남게 되었다. 이 작품은 디지털 데이터의 덧없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생성하지만, 그것들은 영원히 남아있을까? 사실 우리가 찍은 사진, 기록한 글, 저장한 파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오래된 블로그가 폐쇄되고, SNS 계정이 삭제되면, 그 안의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망각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하지만, 동시에 더 쉽게 잊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득 몇 년 전 찍어두었던 사진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중요한 기억이라 생각하며 저장했지만, 이제는 어디에 저장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디지털 기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있을까? 이 전시는 우리가 디지털 데이터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결론: 우리는 이미 아더랜드에 살고 있다
전시를 마치고 미술관을 나서는 길,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시 후기를 남겼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이 글은 얼마나 오래 남아 있을까? 몇 년 후에도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데이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인가?
아더랜드는 단순한 미디어아트 전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으며, 우리의 정체성 또한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 사이에서 변화하고 있다.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까지가 ‘진짜’이며, 어디부터가 가상의 존재인가?
전시는 끝났지만, 이 질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아더랜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