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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의 문화사: 향이 들려주는 시간의 이야기 전시회

by 서진(瑞鎭) 2025. 3. 16.

향의 문화사 전시회

국립대구박물관 전시장에서 열린 “향의 문화사: 염원에서 취향으로”는 향이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는 감각의 기록이었음을 조명하는 자리였다. 과거에는 향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염원의 향이었다면, 이제는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깨우는 기억을 불러오는 향, 그리고 개성을 표현하는 취향의 향으로 변화해 왔다.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퍼지는 은은한 향기가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향은 보이지 않지만, 오래된 기억과 감정을 소환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한 시대를 정의할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특별한 향의 여정을 따라가며, 향이 인간의 삶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1. 염원의 향 –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향이 신성한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 연기가 가득한 이곳에서는, 마치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기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전시된 향로 앞에 섰다. 백 단(白檀)과 침향(沈香)이 섞인 향이 은근하게 퍼져 나왔다. 설명을 읽어보니, 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이 향을 사용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했다고 한다.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깊이 몰입하게 하는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다.

불교 의식에서 사용된다는 또 다른 향을 맡아보았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신비로운 이 향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갔을 때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나는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나지막한 목탁 소리,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던 어른들, 그리고 공기 속을 감싸던 그 특유의 향기까지.

“향은 보이지 않는 기도를 담아 하늘로 올려 보낸다.”

벽에 적힌 이 문장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사람들은 향을 피우며 신에게 염원을 담았고, 그것이 향기를 타고 퍼져 나간다고 믿었다.

2. 기억을 불러오는 향 – 감각의 문을 여는 순간

전시의 다음 공간에서는 향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오는지를 체험할 수 있었다.

중앙에는 여러 개의 유리병이 놓여 있었고, 각 병에는 다른 향이 담겨 있었다. 관람객들은 하나씩 향을 맡아보며, 떠오르는 기억을 적어볼 수 있었다. 나는 한 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향을 맡아보았다.

달콤한 오렌지 향과 은은한 풀 내음이 섞인 향기였다. 순간,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 떠올랐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엄마가 만들어준 유자청을 찬물에 타 마셨던 순간. 손에 닿던 유리잔의 시원한 감촉까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신기했다.

향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옆을 보니 다른 관람객들도 저마다의 기억 속에 빠져 있었다. 한 중년 여성은 오래된 책 냄새에서 학창 시절을 떠올렸고, 한 남성은 커피 향을 맡고 첫 직장 생활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향은 감각을 넘어, 시간과 기억을 저장하는 그릇이었다. 우리가 잊고 지낸 순간들도, 특정한 향을 맡는 순간 다시 선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3. 취향의 향 – 나를 표현하는 감각의 언어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향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과거에는 특정한 종교적 의식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면, 이제는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만의 향’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맞춤형 향수와 니치 향수(소수 취향을 겨냥한 독창적인 향수)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한쪽에는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향수 브랜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한 가지 향수를 시향해 보았다. 처음엔 상큼한 레몬 향이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따뜻한 머스크와 샌달우드의 향이 올라왔다. 마치 한 사람의 인생처럼, 처음엔 밝고 경쾌하다가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느낌이었다.

옆에서는 관람객들이 직접 블렌딩을 해보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향을 조합해 나만의 향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라벤더와 샌달우드를 섞어보았다.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향이 만들어졌다. 이 향은 마치 나 자신을 닮은 것 같았다.

향이 단순한 화장품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결론 – 향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시장을 나서면서 나는 처음과는 다른 시선으로 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향이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을 담아내는 감각의 기록이었다.

과거에는 신에게 바치는 염원의 도구였던 향이, 이제는 나를 표현하는 취향이 되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향은 언제나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공간, 소중한 순간,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기억들 속에서 늘 함께 존재해 왔다.

나는 가방에서 조그만 노트와 펜을 꺼내 짧은 메모를 남겼다.

“향은 기억의 언어다. 내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은, 내가 어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아는 것과 같다.”

이제 나는 내 삶에서 어떤 향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어떤 향으로 나를 기억할 것인가?

이 질문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