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 유난히 찬 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 나는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알고 보면 반할 세계〉를 찾았다. 전통 민화와 K팝아트라는 언뜻 보면 전혀 다른 두 문화가 현대미술이라는 무대에서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시는 ‘꿈의 땅’, ‘세상살이’, ‘뒷경치’라는 세 가지 세계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시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 세계관들이 하나의 우주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디지털 상상력으로 재해석된 전통 도상: ‘꿈의 땅’에서 본 K팝아트의 환상성〉, 〈해학과 풍자로 바라본 우리 삶의 민낯: ‘세상살이’ 섹션의 통쾌한 직관〉, 그리고 〈초월적 사유의 공간에서 마주한 내면: ‘뒷경치’가 던진 철학적 질문〉이었다. 이 세 공간은 각기 다른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우리 미술’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디지털 상상력으로 재해석된 전통 도상: ‘꿈의 땅’에서 본 K팝아트의 환상성
전시 초입에서 마주한 ‘꿈의 땅’ 섹션은 첫인상부터 색다른 기운을 풍겼다. 민화 특유의 기묘한 생명체들과 이상향을 그린 장면들이 현대적인 질감과 디지털적인 감성으로 탈바꿈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제성 작가의 설치작품은 마치 민화 속 세계관을 철과 세라믹이라는 재료로 입체화한 듯한 구성이었고, 그 정교한 조형 속에 숨겨진 기호와 메타포는 하나의 암호처럼 느껴졌다. 김지평 작가의 채색 한지화 ‘두려움 없이’는 전통 민화 속 상상 속 존재였던 ‘삼목구’를 중심에 두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초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동경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세계는 현실을 비껴간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인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를 반영하는 무대처럼 느껴졌다. 형상은 전통을 닮았지만, 감정은 지금 우리의 감정에 가깝고, 그 낯선 조화는 마치 K팝 뮤직비디오 속 판타지 세계와 겹쳐지듯 다가왔다. 이곳에서 나는 민화가 단순한 민속화가 아니라, 디지털 감수성과 결합할 수 있는 유연한 ‘언어’라는 것을 체감했다.
해학과 풍자로 바라본 우리 삶의 민낯: ‘세상살이’ 섹션의 통쾌한 직관
‘세상살이’는 전통 민화의 가장 ‘현실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섹션이었다. 갓을 쓴 호랑이, 도깨비와 사람 사이의 대화, 책거리의 뒤편에 숨겨진 위선 등은 모두 조선 후기 민중의 해학과 풍자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현대의 사회적 문제, 권위 구조, 대중문화와 연결되면서 더욱 직설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익명의 민화 작가들이 그려낸 호작도는 이번 전시에서는 마치 현대 정치 풍자 삽화처럼 읽혔고, 책거리에서 강조되던 위엄과 지식의 상징은 오히려 그 허상을 조롱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했다.
이 공간은 마치 민화와 팝아트가 함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K팝 팬덤, 인터넷 밈, 대중 스타에 대한 집단 심리가 전통 도상 안에 스며들며 하나의 해학적 내러티브로 전환되었다. 나는 이 섹션에서 한국 사회의 깊은 정서를 포착해 낸 작가들의 시선에 감탄했고, 전통의 미감이 어떻게 오늘날의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실감했다. '세상살이'는 유쾌하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풍자하고, 무엇을 꿈꾸는가?
초월적 사유의 공간에서 마주한 내면: ‘뒷경치’가 던진 철학적 질문
전시장 가장 안쪽에 마련된 ‘뒷경치’ 섹션은 앞선 두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초월의 공간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오래된 불경을 읽는 듯한 침묵의 흐름을 경험했다. 민화의 도상들은 이곳에서 신화와 철학의 경계에 서 있었다. 백정기 작가의 ‘촛불 발전기와 부화기’는 촛불과 핵융합의 상징을 결합한 조형물로, 민화 속 주술적 상징을 과학기술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촛불의 온기를 상상하며 다가간 그 기계적 조형물은, 인간의 믿음과 과학이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외에도 작자 미상의 민화들이 마치 성스러운 사본처럼 조명을 받아 전시되어 있었고, 그 곁을 지나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결국, 인간의 감정과 인식을 넘는 것들에 대한 표현이 아닐까?’ 이 섹션은 시각적인 감동 이상으로 감정과 사유를 자극했고, 민화가 단지 장식화가 아니라 철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결론 – 민화의 재해석, K팝아트와 만났을 때 비로소 동시대가 된다
〈알고 보면 반할 세계〉는 단순히 ‘민화가 예쁘다’, ‘K팝아트가 대중적이다’라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 전시는 우리 전통 미술의 상징성과 대중문화의 표현 방식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정체성을 다층적으로 보여주었다. ‘꿈의 땅’에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세상살이’에서 사회를 직시하며, ‘뒷경치’에서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그 여정은 나에게 단순한 미술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경험이었다.
민화는 박물관에 갇힌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나는 미술이었다. 이처럼 전통은 현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K팝아트는 그 거울에 비친 현재의 감정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형식이 되었다.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이미 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