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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 스컬리의 수평과 수직, 그 사이에 흐르는 감정

by 서진(瑞鎭) 2025. 3. 31.

션 스컬리의 수평과 수직

2025년 봄,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션 스컬리: 수평과 수직’은 오랜만에 나를 깊이 몰입하게 만든 예술적 경험이었다. 단순한 삭면 추상이라고만 생각했던 션 스컬리의 작품은 막상 마주하고 보니, 놀라울 정도로 감정적이고 인간적이었다. 이 전시는 션 스컬리의 한국 국공립미술관 첫 개인전이자, 그의 초기 구상 작업부터 최근 대형 조각 작품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구성되었다. 관람을 통해 나는 ‘수평과 수직’이라는 구조 속에 담긴 철학, 회화와 조각의 물성을 넘나드는 실험, 그리고 인간 감정과 시간에 대한 예술적 사유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전시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세 가지 — 대표작의 힘, 대구미술관만의 신작 설치, 그리고 션 스컬리를 둘러싼 철학적 해석 — 을 중심으로 그 깊은 여운을 정리해 본다.

빛과 감정이 얽힌 추상, ‘Wall of Light’의 마법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션 스컬리의 대표작 ‘Wall of Light’ 시리즈였다. 격자와 직사각형이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각 블록마다 다른 색의 깊이와 질감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마치 ‘빛이 스며드는 벽’을 실제로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시리즈는 작가가 멕시코 마야 유적지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연작으로, 시간과 공간, 감정이 색과 형태 속에 중첩되어 있다. 단순히 시각적인 쾌감이 아닌, 감정을 건드리는 추상이라는 점에서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스컬리는 "진정으로 추상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감정의 파편을 구조 안에 가두려는 시도였고,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화면 안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과거의 어떤 기억이나 감정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Landline 시리즈 역시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연상시키는 수평선들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 수평선을 따라 사유하게 만든다. 이처럼 션 스컬리의 추상은 단순한 도형을 넘어서, 감각과 감정을 울리는 회화였다.

‘Daegu Stack’과 ‘38’, 조각으로 확장된 회화

이번 전시의 백미는 단연 대구미술관을 위해 새롭게 제작된 두 점의 조각 ‘Daegu Stack’과 ‘38’이었다. 미술관 야외 정원에 설치된 ‘Daegu Stack’은 4미터 높이의 대형 철 조각으로, 겹겹이 쌓인 금속 구조 안에서 션 스컬리 특유의 회화적 리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날카롭지만 따뜻한 색감, 무게감 있는 재료, 그리고 하늘과 맞닿는 구조는 단순히 ‘덩어리’로 느껴지지 않고 하나의 시각적 시처럼 다가왔다.

어미홀 중앙에 설치된 ‘38’은 도색된 알루미늄 프레임을 층층이 올린 조각이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옆에서 바라볼 때, 작품은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이 구조물은 회화에서 확장된 공간적 실험이며, ‘수직’이라는 조형 요소를 가장 극대화한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조명과 함께 어우러질 때 생기는 그림자의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션 스컬리가 회화뿐 아니라 조각에서도 동일한 조형 언어를 끌고 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형식 너머의 사유, 션 스컬리를 다시 보게 되다

전시 마지막 구간에서 나는 션 스컬리에 대한 비평과 철학적 해석을 다룬 설명문과 도록을 읽었다. 그의 작업이 단순한 형식주의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철학자 아서 단토는 스컬리의 작품을 “상상력을 변형시키는 감각적 구조”라고 표현하며, 그가 미니멀리즘과 추상표현주의 사이에서 현대 회화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Wall of Light’ 시리즈는 시간과 감정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하게 만들고, ‘수평’은 흐름, ‘수직’은 중첩과 축적이라는 시간적 층위를 상징한다고 한다.

스컬리의 회화는 마치 음악처럼 리듬을 갖고 있었다. 반복되지만 완전히 같지 않은 색의 배열, 즉흥적인 붓질, 불균일한 공간의 분할은 재즈나 블루스의 즉흥연주와도 같았다. 그는 인간성과 영성에 대한 이야기 또한 작업에 스며들게 한다. 완벽한 구조보다는 틀어지고 불완전한 면을 의도적으로 남기며, 그 안에서 인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처럼 션 스컬리의 추상은 기하학의 냉정함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의 따뜻한 여백을 담고 있었다.

결론 – 수직과 수평 사이, 감정이 흐르다

‘션 스컬리: 수평과 수직’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화, 조각, 공간, 감정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종합적인 예술적 경험이었다. 션 스컬리의 작품을 통해 나는 추상 회화가 왜 감동을 줄 수 있는지, 왜 그 형식 안에서 인간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이해했다. 그의 수직과 수평은 단지 형식이 아니라, 감정과 시간, 그리고 존재를 표현하는 언어였다.

이번 전시는 단지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느끼는 것’, ‘사유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회화는 울타리 안의 언어가 아니며, 션 스컬리는 그 언어의 폭을 공간, 조각, 철학으로 확장시키며 우리에게 감각의 수평선을 넓히고, 사유의 수직선을 깊게 만드는 법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의 수평과 수직 사이에서, 오래도록 감정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