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경기도미술관 《비(飛)물질》 전시, 감각과 사유를 날게 하다

by 서진(瑞鎭) 2025. 3. 31.

비 물질: 표현과 생각 사이의 틈

2025년 3월, 봄기운이 완연해진 어느 날, 나는 경기도미술관에서 시작된 장기 기획 상설 전 《비(飛) 물질: 표현과 생각 사이의 틈》을 찾았다. 이 전시는 기존의 '아닐 비(非)' 개념을 벗어나 '날 비(飛)'로 의미를 확장하며, 물리적 형체가 없는 비물질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질문하고 사유하게 만든다. 평면,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각적 표현을 넘어서고, 연극적인 전시 구성과 수행적 프로그램이 전시 자체를 ‘살아있는 시간’으로 만든다. 특히 금혜원, 오로민경, 임민욱 등 작가들의 퍼포먼스와 소장품을 활용한 미디어 작품들이 관람객의 감각과 생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전시’라는 고정된 틀을 넘어선 《비(飛) 물질》은 예술이 어떻게 시간을 따라 진화하고, 사람과 호흡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순간들이었다.

소장품과 작가 이야기 – 비물질의 감각을 체험하다

전시장을 들어서자 마치 연극 무대처럼 어둡고 고요한 분위기가 관람객을 맞았다. 단순히 감상하는 것을 넘어, 공간 안에서 내가 하나의 요소처럼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로 만난 작품은 금혜원의 <가족사진(2018)>이었다. 물리적 물성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머무르지만, 그 안에는 기억, 정체성, 관계라는 추상적 개념이 섬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녀는 퍼포먼스 워크숍을 통해 사진 속 이야기를 직접 풀어내고, 가족의 기억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해냈다.

오로민경의 <소리 뒤의 소리 #2: 마른풀의 노래(2024)>는 비물질의 핵심을 소리로 풀어낸 작품이었다. 사운드는 물리적 형체가 없지만, 감정과 기억을 자극한다. 작가는 ‘소리의 위로’라는 테마로 관객과의 소통을 이끌어냈고, 나는 그 사운드 퍼포먼스를 보며 눈을 감고 ‘소리의 공간’을 체험하는 기분을 느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가 중 한 명은 임민욱이었다. 그의 <포터블 키퍼(2009)>와 <꼬리와 뿔(2009-2010)>은 폐허와 생명, 잊힌 공간과 기억을 동시에 호출하는 힘을 가졌다. 공간 설치와 미디어가 결합된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 물질과 비물질, 시간과 감정이 얽히는 접점을 형성했다. 전시장에서는 그의 퍼포먼스 워크숍도 진행 중이었는데, 직접 참여하면서 공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미디어와 퍼포먼스 – 시각을 넘어선 감각의 예술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핵심은 바로 '미디어'와 '퍼포먼스'였다. 경기도미술관 소장품 중 비물질군에 해당하는 미디어 작품들은 물리적 형태가 없이도 얼마나 깊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한석경의 <늦은 고백(2019-2021)>은 실향민이 남긴 사진, 지도, 기록물 등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는데, 작가는 이 기록들을 디지털 영상과 오디오로 재해석해, 단순한 정보의 나열을 감각적 경험으로 전환시켰다. 퍼포먼스 워크숍에서는 이 자료를 낭독하고, 관객과 함께 ‘기억의 장소’를 상상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조은지의 <봄을 위한 목욕(2018)>은 사람과 동물이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을 다루며 생명에 대한 사유를 자극했다. 전시된 영상 속 장면도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그녀가 직접 참여한 워크숍에서는 삶과 죽음, 연결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과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미디어 아트는 단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현대미술이 감각의 경계를 허물며 비물질로도 강력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성과 철학 – 전시가 ‘연극’이 되는 순간

《비(飛) 물질》이라는 전시는 단순히 소장품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전시는 연극적 구성을 차용해 1막(2025년 3월 20일 ~ 8월 31일)2막(2025년 9월 16일 ~ 2026년 6월 28일)으로 나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 내용이 변화하도록 기획되었다. 마치 공연처럼 ‘막’이라는 구성이 도입되면서, 이 전시는 하나의 이야기로 관객과 함께 ‘살아간다’.

2025년 5월에는 비물질 개념을 철학적으로 논의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2막 전시가 구성된다. 하나의 전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유와 담론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전시장 자체도 인상 깊었다. 삼화페인트와의 협업으로 조성된 친환경 컬러의 전시 공간은 시각적 피로감을 줄이고, 작품과 공간 사이의 긴장을 절묘하게 조율했다. 예술은 이렇게 환경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퍼포먼스 워크숍 또한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작가가 직접 자신의 사유와 이야기를 관객과 나누는 자리였다. 이는 '작품을 설명하는 강연'이 아니라, '작품이 되어가는 순간'이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비(飛) 물질》은 바로 이 '틈' 속에서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결론 – 물성이 사라진 자리에 감각과 사유가 피어나다

《비(飛) 물질: 표현과 생각 사이의 틈》 전시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라, ‘예술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숨 쉬는가’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물성이 없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던 것들 — 소리, 기억, 감정, 사유, 상처, 위로 — 이 모든 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날개를 달았다.
작품은 더 이상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이거나, 스크린에만 투영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 심장 속, 걸음을 멈추게 한 침묵 속에 머물렀다.
나는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이란 물리적 형상보다도 생각과 감정, 이야기와 수행, 질문과 침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그 '틈'이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임을, 《비(飛) 물질》이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