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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 《건축의 장면》 전시를 다녀와서

by 서진(瑞鎭) 2025. 3. 30.

건축의 장면 전시회

2025년 3월의 어느 평일 오후,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건축의 장면》 전시를 다녀왔다. 그동안 건축 전시라 하면 멋진 외관의 건축물 모형이나 유명 건축가의 설계 도면이 떠올랐지만, 이 전시는 시작부터 그 생각을 흔들었다. 이곳은 건축을 단순히 ‘건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태도’이자 ‘관점’으로 제시한다. 관람 전부터 “이 전시,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직접 보고 나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세 가지 지점이 있다. 첫째는 건축을 예술적 사유의 대상으로 확장한 주요 작품들, 둘째는 영상과 미디어를 활용한 감각적인 설치 방식, 셋째는 작품 속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와 도시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경험이다. 이 글에서는 그 세 가지 관점에서 《건축의 장면》 전시를 다시 풀어보려 한다.

예술로서의 건축 – 생각하게 만든 작품들

가장 먼저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 뉴욕 기반 건축 스튜디오 모스 아키텍츠(MOS Architects)의 <로맨스 오브 시스템즈(Romance of Systems)>였다. 전시장 입구 가까이 배치된 이 영상 작품은 길게 이어지는 롱테이크 기법을 통해 건축 모형을 수평으로 따라가며 보여준다. 처음에는 단순한 건축 모델 같았지만, 영상 속 두 건축가의 담담한 대화와 배경 음악이 어우러지며 건축을 둘러싼 사유와 상상을 풀어냈다. 특히 “건축은 형태만이 아니라 태도다”라는 문장이 반복될 때마다, 나 역시 내 주변을 이루는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박선민 작가의 <버섯의 건축>도 특별했다. 곶자왈 숲에서 발견한 버섯을 클로즈업한 영상에 여러 건축가의 내레이션이 더해진 이 작품은, 생명의 확장과 건축물의 생성이 닮았다는 흥미로운 시선을 제공했다. 나는 이 작품 앞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 영상은 단순한 자연 기록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자연이 만들어낸 구조물이 어떻게 닮아 있는지를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작은 버섯이 하나의 구조체로 느껴졌고, 생명의 흔들림이 설계의 균형처럼 다가왔다.

감각적 몰입 – 영상이 이끄는 건축적 상상

《건축의 장면》은 물리적인 구조물이 거의 없는 전시였다. 전시장은 대부분 어두운 조명 아래 구성되어 있고, 관람객들은 영상 속에서 ‘건축’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영상과 사운드가 함께 흘러나오는 공간에서는 마치 내가 그 안에 들어간 것 같은 몰입을 느낄 수 있었다.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방식이다.

모스 아키텍츠의 영상은 그 시각적 리듬감과 사운드 디자인으로 인상 깊었고, 박준범 작가의 <대피소 리허설>이나 이윤석의 영상에서는 도시의 공공시설과 비상시스템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이어졌다. 특히, 박준범의 작품에서는 신축과 철거가 동시에 이뤄지는 도시의 풍경이 보여졌는데, 그것은 단순한 도시 재개발 장면이 아니라, ‘공간의 생로병사’를 시적으로 해석한 장면 같았다.

전시장의 영상들은 대부분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어 집중해서 보기 위해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좋다. 나는 약 1시간 반 정도 머물렀지만,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각 작품에 담긴 의미가 풍부하고, 설치 공간 자체도 매우 조용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영상에 더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었다.

건축과 도시를 다시 생각하게 한 전시

《건축의 장면》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이 전시가 ‘건축’에 대한 나의 기존 관념을 완전히 뒤집었다는 점이다. 나는 건축을 '기술'이나 '디자인'의 산물로만 생각했지만, 이 전시는 건축이 정치, 생태, 사회, 그리고 사람의 기억과 정서에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박선민 작가의 <39일간의 철거기록: 청파동 굴뚝건물>은 청년들의 주거 문제를 조명하면서 단순히 하나의 건물이 사라지는 과정을 넘어,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감정, 추억, 생활까지 담아냈다. 이 영상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며, 철거 전후의 모습이 교차 편집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영상을 보는 동안 그 공간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건축을 ‘삶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순간, 도시의 모든 풍경이 달라 보였다. 전시장을 나서는 길, 나는 길거리의 평범한 건물과 철거 중인 골조마저도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단지 구조물의 변화가 아니라, 기억과 관계, 그리고 감정의 이동이라는 걸 이 전시가 알려줬기 때문이다.

결론 – 건축은 더 이상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건축의 장면》은 지금까지 내가 접해온 어떤 건축 전시와도 달랐다. 거대한 건축물도, 유명한 건축가의 도면도 없이, 오직 사유와 감각, 영상과 사운드로 건축을 말한다. 전시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생각의 공간에서 건축을 상상하게 했고, 나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모스 아키텍츠의 <로맨스 오브 시스템즈>, 박선민의 <버섯의 건축>, 박준범의 <대피소 리허설> 등은 단순히 ‘잘 만든 작품’을 넘어, 나의 사고를 흔든 ‘경험’으로 남았다. 건축은 이제 나에게 건물이 아니라, 사람, 시간, 기억, 자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연결하는 방식이 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에서의 조용하고 깊은 감상의 시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고, 공간 속에 담긴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곧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