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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대 회화의 흐름》- 시간을 걷는 붓끝의 저항과 울림

by 서진(瑞鎭) 2025. 3. 26.

대구근대화의 흐름

대구미술관의 상설 전 《대구 근대 회화의 흐름》을 관람한 것은 차가운 바람이 불던 어느 평일 오전이었다. ‘가볍게 둘러봐야지’라는 마음으로 입장했지만, 전시가 끝나고 나왔을 땐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져 있었다. 이 전시는 단순한 미술 감상이 아니라, ‘색채와 붓질로 시대의 고통을 증언한 예술가들의 흔적’,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문화적 전환점에서 기록된 예술의 증언’, 그리고 ‘전통과 모더니즘이 교차하는 추상화의 시작과 실험’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고뇌와 시대적 사명이 스며든 작품들 앞에서 나는 자꾸만 멈춰 섰고, 어느 순간 이 전시는 ‘미술’이 아니라 ‘역사’로 다가왔다.

색채와 붓질로 시대의 고통을 증언한 예술가들의 흔적

전시의 첫 장에서는 서양화가 막 유입되던 시기의 작품들이 펼쳐졌는데,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붓질 속에 고스란히 담긴 고통의 기운이었다. 주경, 서동진, 박명조와 같은 대구 출신의 근대 작가들은 단순히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을 들어 자신의 시대를 기록했고, 때로는 거세게 저항했다.

권옥연의 《폐허에서》는 황량한 풍경 속에 인간의 고독을 담아내며, 전쟁의 상흔과 해방기의 혼란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서병주의 《괴석란》은 괴이한 형상의 돌과 난초를 통해 현실을 초현실적으로 환기시키며, 당시 예술가들이 겪은 심리적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들 앞에서 나는 단순한 시청각적 감상 대신, 작가들의 고뇌에 잠식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붓을 통해 외쳤고, 색채를 통해 울부짖었다.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 그러나 더 생생한 시대의 이야기들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문화적 전환점에서 기록된 예술의 증언

전시 중반부로 들어서면서 등장한 사진, 서신, 신문 스크랩 같은 아카이브 자료들은 나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림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긴장감이 작가들의 사적인 기록과 문서 속에서 더욱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서동진 작가가 남긴 수기 한 편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그는 예술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그 의지가 매 작품마다 스며 있었다. 전쟁 중 피난지 대구로 몰려든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각자의 혼란과 슬픔, 희망을 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구는 하나의 미술사적 중심지로 거듭났다.

교남시서화연구회와 벽동사, 향토회 등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들을 보면서, 나는 당시 예술가들이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 사회와 시대를 직면하는 지식인이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이 자료들을 찬찬히 읽어가는 동안, 마치 그 시대 속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전통과 모더니즘이 교차하는 추상화의 시작과 실험

전시의 마지막 장에서는 추상미술의 흐름이 두드러졌다. 특히 이영룡의 《정토 A-103》은 형체 없는 형태로 관람객을 압도하며, 색채의 리듬과 공간의 구조만으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앙그리(Angry)’라는 추상미술 그룹을 창설하며 한국 추상화의 방향성을 제시한 인물인데, 그의 작품은 서구적 추상기법에 한국적 정서를 접목한 시도였다.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림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그저 ‘느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정형화된 자연 풍경에서 벗어난 이 추상 작품들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예술가가 어떤 ‘내면의 자유’를 갈망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관념과 감각이 뒤섞인 채 흐르는 캔버스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이전의 어떤 작품보다도 깊은 몰입을 경험했다. 전통과 모더니즘이, 현실과 초월이 그 경계 없이 흘러가는 듯한 순간이었다.

결론 – 예술은 시대의 메아리이자 인간의 회복을 위한 언어였다

《대구 근대 회화의 흐름》 전시는 나에게 단순한 미술 감상을 넘어선 감정적, 사유적 체험이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시대의 흐름과 예술가 개인의 서사를 함께 품고 있었고, 나는 그 길을 조용히 따라 걸었다.

‘색채와 붓질로 시대의 고통을 증언한 예술가들의 흔적’은 그 자체로 예술가의 투쟁이자 사랑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문화적 전환점에서 기록된 예술의 증언’은 역사가 어떻게 예술 속에 살아 숨 쉬는지를 보여주었고, ‘전통과 모더니즘이 교차하는 추상화의 시작과 실험’은 예술이 얼마나 유연하게 시대와 대화하는지를 느끼게 했다.

오랜 시간 전시장에 머무는 동안 나의 시선은 예술 작품 위에 있었지만, 마음은 그 너머의 인간과 시대, 고통과 희망에 닿아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했다. 예술은 결국 인간을 위한 가장 오래된 회복의 언어라는 것을.